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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품은 다른 어떤 상품보다도 특별한 존재다. 자동차나 스마트폰처럼 물리적 기준만 충족하면 자유롭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제품이 아니다. 인체에 직접 작용하는 의약품은 안전성과 유효성의 과학적 근거가 입증돼야만 시장에 등장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국가는 의약품의 허가권을 정부가 가지고 있다. 이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기본 장치다.
이 글에서는 미국의 허가 조건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해 대한민국의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해 보려 한다.
미국의 경우 신약 허가받기 위해서는 표적 적응증에 효과가 있다는 실질적 증거가 확보되어야 한다. 이 개념은 1962년 키파버-해리스 법 개정을 통해 제도화됐다.
당시 임상 시험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고 판매되던 약 때문에 100여 명의 어린이가 숨졌다. 일명 설파닐아미드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1937년 미국에서 발생했다. 이어 1960년대 탈리도마이드 사태에서도 1만 명이 넘는 기형아가 태어났다.
이 두 사건은 제약사 자율에 맡겨졌던 안전성·유효성 평가의 한계를 보여줬다. 이후 미국은 과학적 증거를 허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FDA의 실질적 증거 개념은 흥미롭게도 객관성과 주관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과학적 데이터라는 객관적 근거 위에 FDA가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주관적 판단이 얹히는 구조다.
즉, 임상시험 결과가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승인되는 것이 아니라 규제당국이 그 데이터를 과학적·윤리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허가가 이뤄진다.
우리나라의 제약 규제는 훨씬 뒤늦게 시작됐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약허가신청(NDA)과 임상시험계획승인(IND)이 분리되지 않아 신약개발이 사실상 어려웠다.
하지만 2002년 제도가 정비되면서 해외 임상시험 제도가 국내에 도입됐고 이를 계기로 신약 연구개발이 활발해졌다. 제도 개혁이 곧 산업 성장의 촉매 역할을 한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우리나라 제약산업은 여전히 규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구조에 갇혀 있다. 디지털 치료제나 분산형 임상시험(DCT) 같은 혁신적 시도가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으나, 식약처는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금지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중국 일본 등은 이미 분산형 임상시험을 허용하고 있다. 한국만 규제가 없으니 불가능하다는 논리로 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임상시험의 원칙은 단 하나다. 과학적 타당성과 데이터의 신뢰성.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새로운 임상방식이 이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굳이 금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식약처는 원칙보다 방법을 앞세운다.
승인된 절차만 유효하고 새로움은 항상 위험하다고 여긴다. 결과적으로 혁신적 접근은 불가능해지고 국내 제약산업은 규제의 벽에 갇혀 후진국형 체계로 남게 된다.
FDA가 두 번의 참사를 통해 실질적 증거라는 개념을 세웠듯, 우리 식약처도 규제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물어야 할 시점이 됐다.
규제는 산업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장치다. 방법을 통제하기보다 원칙을 지키는 방향으로 불허의 논리보다 가능성의 논리로 전환해야 한다.
식약처가 지금처럼 허용되지 않은 것은 불허라는 태도를 고집한다면 우리 제약산업은 결코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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